나의 글

그날을 생각하며

필곡 2022. 4. 3. 22:25

  만뢰산에서 서쪽으로 내려온 산줄기가 큰 원을 그리듯 도(道) 경계를 가르며 뻗어있고, 거기서 갈라져 크고 작은  골짜기 골짜기를 이루고, 그중 한 골짜기를 차지한 평범한 마을이 있다.
 마을 입구에서 보면 우람한 둥구나무가 역사를 말하듯 고고하게 서있고, 마을 사람들의 수호신으로 사시사철 마을을 지켜준다는 상징성이 크겠지만, 그 보다 더 큰 역할을 하는 것은, 한 여름 그늘을 만들어 시원한 바람으로 더위에 지친 마을 사람들의 쉼터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 둥구나무는, 마을 뒷동산 오른쪽 산자락 낮은 언덕에 넓게 터를 잡고 있어, 거기 서서 돌아보면 한쪽으로는 마을이 한쪽으로는 들녘이 훤히 보인다.

 [ 운명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수 있었다.

몸도 몸이지만 불현듯 집도 그립고 고향 땅도 밟고 싶고 부대끼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하였다.
그런 마음을 고집하여 간암으로 복수가 차 불룩해진 배를 안고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죽으나 사나 이 곳이 내가 있을 곳이다.
그동안 불편해진 몸을 진찰이라도 받아볼 심정으로 서울로 가서는, 신혼 생활하는 아우 집에서 염치 불고하고 두어 달 통원치료를 받고 있었지만 마음은 항상 고향에 있었다. 
고향 땅을 밟고 서니, 마음 같아선 곧바로 어떤 것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마음 뿐이고, 몸은 기운이 없어 방문을 활짝 열어 놓은 상태로 누워 있었다.
변함없이 낯익은 산과 들, 낮은 집들이 보였다.
바쁜 와중에도 어떻게들 알았는지 안부겸 인사 겸하여 다들 찾아주셨다.
그리웠던 얼굴들로 모두가 반가웠다.
"모내기가 막바지에 이르러 바쁘다."
"몸조리 잘하시라." 하고는 바쁜 걸음을 재촉했다.
모내기 중에 틈을 내서 들른 모습들이다.
일 년 중 가장 바쁜 철이로구나!
단오도 한참 지난, 한여름 같은 더운 날씨다.
둥구나무가 있는 등너머에서 풍물 소리가 흥겹게 들려오고 있었다.
부잣집에서 모내기를 하는듯 하다.
토요일 학교에서 돌아온 국민학교 4학년짜리 아들의 부축을 받아 둥구나무 밑으로 갔다.
철이 철인지라 노인분들만 몇분 계셨다.
"그래 몸좀 어떤겨?"
"괜찮아요." 대답은 이렇게 하였지만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그려! 그려! 우선 몸 좀 편하게 앉게."
안타까워하는 표정으로 어른들께서 안부를 묻고 자리를 권했다.
풍물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모내기하는 모습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모두 다 친구들이고 형님들이고 동생들이었다.
질척하고 첨벙이는 저 논바닥에 뛰어들어 어깨를 부대끼며 모도 심어보고 싶고, 풍물패에 끼어서 한바탕 흥도 돋아보고 싶었지만 마음뿐이었다.

 두 손으로 아들 손을 꼭 잡았다.
언제 또 잡을 수 있을까...
놓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많이 커 보이기도 했지만, 언제 장성하여 내 대신 집안일들을 끌고 갈 수 있을까? 하는 심정과 내 몸이 이렇다는 생각으로 안타까움 뿐이었다.
일철이 나서면서 서울로 간 것이 엊그제였는데...
벌써 모내기가 끝나가고 있구나.
그간 우리 집 농사 준비는 어떻게 되었나?
산골 다랭이 논농사도 논농사지만 이미 시작한 담배 농사는 또 어떡할 것인가?
누가 쇳일을 할 것이며 지게질이며 농사를 지를 것인가?
일 년 농사가 훤하게 그려지지만 내손으로 못할 것 같은 걱정에 눈물이 앞을 가린다.
사내 어른들이 죽을 지경으로 하여도 계절을 따라잡기 힘든 일이 농사일인데...
연로하신 어머니는...
어린것들과 집사람은...
내 나이 이제 서른아홉, 이렇게 스러져가면 안 되는데...
스스로 눈을 감았다.

 월하 감나무 꼭대기에 벌레 먹어 빨갛게 익은 감이 눈에 들어왔다.
나뭇가지를 밟아가며 조금씩 조금씩 그 홍시를 향해 올라갔다.
감나무 가지도 점점 가늘어졌다.
멀리 쳐다보니 누렇게 물들어가는 들녘이 넘실넘실거렸다.
한 팔 거리의 홍시를 잡기 위해 한발 더 올랐다.
나무가 휘청 휘청거렸다.
겁이 났다.
조금만 한 뼘만 더 오르면 손에 닿을 것 같았다.
밟을 만한 곳을 찾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땅이 왔다 갔다 했다.
마지막 발판을 밟고 올라섰다.
"뚝"하는 소리와 함께 꽹과리 자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꼭 집았던 손을 놓쳤다.
아들이 손을 빼고 있었다.
흐릿하게 눈이 떠지면서 주르륵 양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있었다.
꽹과리 소리의 리듬이 빨라지면서 풍물 소리가 더욱 요란하게 들리는 것으로 보아 모내기도 끝판인가 보다.

"비가 올까 보다  집으로 모셔라"
어른들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아들의 부축을 받아 집으로 돌아와 누웠다.
몰려드는 먹구름 탓인지 주위가 금세 어두워졌다.
하늘에서 번쩍번쩍하면 주위가 환해졌다가 이내 우르릉 우르릉 쿵쾅 거리며 대지를 울렸다. 

두둑두둑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내일 아침 밝은 햇살을 받으며 상쾌한 몸으로 일어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소나기가 한바탕 지나간 이튿날 조용하게 떠나셨다.
몸만 내려놓고 멀리...
 아무런 작별의 말씀도 없이...
미안하다는...
 하긴 무슨 말을 할 수가 있었을까?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나와 동생들을 남기고서...

"초혼(招魂)
                          -김소월-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고복(皐復)으로 부터 장례절차가 이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아버지의 존재 자체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왜 였을까?
어려서였을까?
글쎄!!!
그동안 기억될 만한 충격적인 그 무엇도 없이 단조롭고 밋밋한 생활환경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돌아가셨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다가 장례기간을 겪으면서 죽음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수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마저도 다시 잊혔다.
그동안의 일상으로 당연했고 아버지의 기억을 일깨울만한 그 무엇도 없었던 탓이었을까?
어제 조부모님, 부모님 산소가 모두 불에 탔다는 소식을 접하였고, 급히 가서 둘러보고는 새까맣게 변한 모습을 보고 죄스러운 마음에 이 글을 쓴다.

그동안 삶의 터전으로 비비고 부대꼈던 밭머리 산기슭에 모셨던 산소를, 돌아가시기 전날 보았던, 풍물소리 장단에 맞춰 모내기하던 들녘 그 언덕 위로, 몇 해 전에 산소를 이장했다.
바로 밑으로 들녘이 보이고, 개울 건너에 둥구나무가 그리고 그 등 너머로 마을이 훤이 보이는 장소로....
그런데 작은아버지께서 산소에 갔다가 한순간의 실수로 그만 산소를 홀딱 태웠다고 하셨다.

얼마나 놀라셨을까?
그나마 산으로 옮겨 붙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날 모내기하던 논들은 서서히 오이 하우스들로 하얗게 변해 가고 있다. 

세월 따라 시대 따라 변해가고 발전되는 모습 바라보시며, 잘 보살펴 주십시오.

 

2022년 4월 3일